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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 (18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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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경(1827년)은 조선 순조 때 전계대원군과 완양부대부인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서장손이자 철종의 이복 형이며, 헌종에게는 7촌 아저씨가 된다. 1844년 민진용 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어 사사되었으며, 철종 즉위 후 회평군으로 추봉되고 효민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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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 (1827년)
기본 정보
회평군 영정
명 (明)
초휘원경 (元慶)
작위회평군 (懷平君)
시호효민 (孝愍)
출생1827년
사망1844년
묘소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신분
본관전주 이씨
왕족 계보장조 - 전계대원군 - 회평군
전계대원군
완양부대부인 최씨
배우자부인 최씨
종친 계위현록대부

2. 생애

1827년 전계대원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은언군상계군의 왕위 찬탈 계획과 신유사옥으로 인해 사사되면서, 종친부에서 왕족 호적이 삭제되었고, 전계대원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빈곤한 생활을 했다. 1844년 민진용이 회평군을 조선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이원경은 16세의 나이로 졸서했다. 졸서 직전에는 갑자기 큰 벼락과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경기도양주시에 매장되었고, 1856년 포천시 선단동으로 이장되었다. 1858년 이름을 '원경'에서 '명'으로 개명하고, 회평군에 봉작되어 현록대부[3] 관위를 받았다[5][6]. 1863년 시호를 '효민'으로 추증받았다[7].

2. 1. 초기 생애

1827년(순조 27) 음력 9월 11일 신시(申時)에 강화도 부내에서 전계대원군의 장남이자 유일한 정실 소생 적자로 탄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원경이었다. 사도세자의 서장남 은언군의 손자이자 철종의 이복형이었다. 아버지는 농민인 전계대원군, 어머니는 증 의정부 영의정추증된 최수창의 딸 완양부대부인 최씨이다. 헌종에게는 7촌 아저씨가 된다.

아버지 이광은 할아버지 은언군이 이복 백부 상계군 세자 추대 사건과 조모 송씨, 백모 신씨의 사건에 연좌되어 처벌받았으며,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서자라서 생전에 작위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에게도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

1830년(순조 30) 순조의 특명으로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일시 방면, 도성으로 올라와서 살도록 허락해주어 부모와 함께 한성부 경행방에 거주하였다. 철종의 묘사에 의하면 그는 의용이 아름다웠고, 품성은 온화하고 순수하였다. 성격은 유완(柔婉)하여 부모의 말씀을 어기거나 거스름이 없이 그대로 따랐으며, 형제간에도 서로 공경하여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 한다. 평상시에는 질병이 없이 건강했다.

2. 2. 민진용의 옥사와 죽음

1844년(헌종 10) 가을, 정부에 불만을 품은 중인 출신 여흥인 민진용(閔晉鏞), 이원덕(李遠德), 이종락(李鍾樂) 등이 왕족인 원경(元慶)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처참당했다.[8] 이들을 추대하려는 음모에는 그의 외삼촌 최영희(崔英熙) 등도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민진용은 무인(武人)이자 서얼로써 중인이었지만,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이조, 호조판서우의정을 지낸 노론 중신 민응수(閔應洙)였다. 민응수의 4대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몰락했고, 그는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원경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원덕은 의술에 능한 인물로 그의 아버지 이광과 가깝게 지냈다. 이해 8월, 택군 대상이 되었던 원경(元慶)도 삼사의금부 등으로부터 계속 탄핵을 당하고, 그해 9월 6일 사사되었다. 민진용의 옥사와 관련된 그에 대한 왕조실록 기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은 철종 즉위 후 대량으로 세초, 말소되었다. 이는 1989년 대한민국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해당 자료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2. 3. 사후

1856년(철종 7) 4월 8일 시신은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 산11번지(현,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 산11번지) 침갑(枕甲) 부락, 전계대원군 묘 동쪽 100m 지점이자 선단초등학교 근처로 이장되었다. 묘비문은 1859년 서제 철종이 짓고, 당시 병조판서 겸 홍문관예문관대제학직을 겸하던 김병학(金炳學)이 글씨를 썼다.[3] 그는 전계대원군의 유일한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이 사망하여, 전계대원군의 봉사손 자리와 누동궁의 종주 자리는 그의 서출 이복동생인 영평군 경응의 후손들이 상속받았다.[3]

승정원일기, 헌종실록, 일성록 등에는 그를 추대했던 민진용, 민순용, 이원덕 등의 기사는 나타나지만 그의 이름이 실린 기록은 인멸, 삭제되었다. 언제 헌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기사에서 그의 이름이 대량 삭제, 세초, 인멸됐는지는 알 수 없다.[3] 2004년부터 전주대학교, 한국학연구재단 등에서 한글 번역 중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2008년부터 김우철, 허부문 외 4명이 공동 연구 중인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변란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는데도 당대의 문인, 관료들의 문집에 그의 이름이 실리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반대로 그의 조부 은언군 이인은 역인(逆草+因), 성과 작위를 뺀 인(草+因)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나타나는 것과는 다소 대조적이다.[3]

서제 철종 즉위 후 1849년 신원, 복권되었으며[3] 1858년(철종 9) 11월 9일 그의 군호를 추상할 때 서승보(徐承輔)가 회평(懷平)으로 정해 상시하고 그대로 추봉하였다. 같은 날 회평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봉되고, 증 현록대부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전계대원군의 묘소가 있는 포천군 주내면 선단리(현 포천시 선단동) 산11번지 해룡산으로 이장되었다.[3] 한편 그를 추대하려 했다 하여 처형당한 민진용의 집안에서는 항렬을 용에서 호(鎬)로 바꾸었다.

1863년(철종 14) 11월 7일 시호는 효민(孝愍)에 추증하였다.[3] 그러나 양자를 세웠는가 여부는 미상이다. 고종 즉위 후에 기록된 선원보략에도 그의 이름 아래에 양자를 세운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3]

3. 인물됨

철종이 친필로 쓴 비문에 의하면, 이원경의 집안은 여러 번 어려운 일을 당하는 기구한 운명과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바람과 큰 물결에 3대가 희생되고, 형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희생되는 슬픈 일을 겪었다고 철종은 안타까워했다.

이원경의 풍모는 단정하고 수려했으며, 성격은 순수하고 솔직하며 온화하고 상냥했다. 동생들과 화목했고, 고민이나 두려움이 없었으며, 노비천민에게도 감사의 말을 반드시 전했다. 철종은 그의 인덕과 행실이 무학무식함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인격이라고 평가했다.

4. 가계

이원경(李元慶)은 사도세자의 서장남 은언군의 손자이자 철종의 이복형이다. 아버지는 전계대원군 이광이며, 어머니는 완양부대부인 최씨로 최수창의 딸이다.

관계비고
증조부사도세자 이선1735년 2월 13일 ~ 1762년 7월 12일
할아버지은언군 이인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30일
적조모상산군부인 송씨1753년 10월 15일 - 1801년 3월 17일
생조모전산군부인 이씨1764년 - 1819년 6월 4일
아버지전계대원군 이광1785년 - 1841년, 철종의 생부
생모완양부대부인 최씨전주 최씨, 최수창의 딸
서모용성부대부인 염씨
서모이씨(李氏)
이복 동생철종 이변1831년 - 1863년, 제25대 국왕
이복 동생영평군 이경응1828년 - 1901년
이복 제수정경부인 평산신씨1832년 7월 22일 - 1857년 5월 8일
이복 제수정경부인 청도김씨1839년 3월 23일 - 1921년
부인미상실전
자녀없음


참조

[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1-05-06
[2] 웹사이트 회평군 이명 https://m.blog.naver[...] Naver 2021-05-06
[3] 서적 大典会通
[4] 문서 만 나이
[5] 뉴스 『哲宗実録』第10巻 9年(1858年戊午/咸豊8年) 旧暦11月9日(庚辰)4件目 http://sillok.histor[...]
[6] 뉴스 『哲宗実録』第10巻 9年(1858年戊午/咸豊8年) 旧暦11月13日(甲戌)5件目 http://sillok.histor[...]
[7] 간행물 『龍湖間録』第14巻 http://db.history.go[...]
[8] 문서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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